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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아산시의회유기준의장,....연해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우수리시크 최재형 독립운동가 생가와 우정마을을 탐방하며_

  • 등록 2015.08.27 11:45:00
차량으로 2시간을 달려 우수리시크 독립운동가 최재형 생가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한인들이 다시 우수리시크 지역에 돌아와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산 고려인 우정 마을을 돌아보았고, 특히 한국인이 이곳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선교사로 왔던 고 김창식 순교묘지도 돌아보았다.

우수리시크는 한인들이 소황령 또는 쌍성자(雙成子)라고 불렀다. 우수리시크는 한인들이 시베리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살고 있었다라고 한다. 이곳에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활동했던 곳이다.

최재형(崔在亨)은 누구인가?
최재형)1858 철종9년 – 1920년) 독립운동가 이다. 일명 재형, 도헌, 러시아 이름으로 뻬돌쏘오, 최뻬찌카이다. 그는 함경북도 경원출신으로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키(한국명, 연추(煙秋)에 이주하여 살다가 러시아에 귀화하였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치부하여 관리가 되고 두 차례에 걸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고 5개의 훈장까지 받았다. 노우키에프스크(연추)에 도헌(都憲)이 되어 연봉3,000루블을 받게 되자 은행에 예금하여 그 이자로 매년 교포 유학생 1명씩을 페테르부르크에 보내서 유학을 시켰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해군 소위에 임명되어 경무관 부속 통역관으로 활약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에 귀화한 교포들을 규합하여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한 군인들의 다수가 러시아의 노우키에프스키(연추)로 모이자 이들에게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 편 이범윤(러시아공사)으로 하여금 거사하게 하였다.

1908년 3월 헤이그밀사 특사였던 이위종이 군자금1만 루블을 가지고와서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고 이를 계기로 다음해(1909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범윤과 같이 의병600명의로 의진을 정비하고 이해 7월 대장이 되어 정예병200여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원의 신 아산(新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으며, 회령의 영산(永山)에서 일대 결전을 치르고 노우키에프스키(연추)로 돌아왔다.

1910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되는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이를 인수하여 재 간행함으로서 교포들의 계몽과 항일 사상고취에 힘쓰고 일제의 침략 만행을 통박하는 등 언론투쟁도 전개하였다. 또한 노우키에프스키(연추)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고 이범윤으로 하여금 2세교육에 진력하게 하는 토크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윤능효의 집에 동지 10여명을 모아놓고 재러 한인대표 2명의 위원을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할 것과 그 여비로 5만 루블을 갹출할 것을 의결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당하여 활약하였다. 이해 4월10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최재형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노령(露領)을 근거로 계속 독립운동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4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을 하자 재러 한인의병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였으나 김이직, 황경섭, 엄주필 등과 같이 피난갈수 있었으나 의연하고 떳떳하게 도망가지 않고 일본군에 붙잡혀 한인마을에 한인들과 함께 잡혀서 무참하게 살해 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최재형이 살았던 우수리스크 생가는 2014년 정부에서 구입하여 독립운동의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필자는 최재형 생가를 가리키며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정마을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우수리스크(소황령)에는 한인들이 연해주지역에서 제일 두 번째로 많이 모여 살았다. 1860년 이후부터 한인들은 계속하여 두만강을 건넜고 또한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였다. 1938년 스탈린이 한인들을 일본제국의 첩자로 판단하여 대규모로 중앙아시아에 18만 명을 이주시켰다고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1990년 옐친이 대통령이 되었고, 1998년 한인들을 위한 법령을 만들었다.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했던 한인들이 우수리스크로 돌아와도 좋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한인들이 1998년 서서히 블라디보스톡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한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집이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이 사용했던 패 막사에 살면서 추위와 함께 배고픔으로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대한주택 건설 협회 박길훈회장을 중심으로 임원들이 의기투합하여 러시아 연해주 한인동포 재활기금을 설립하여 우정마을을 건립, 장학금지원, 한글학교개설, 농장운영등을 1988년부터 2004년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많은 집을 짓고 한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기념비를 세우고 우정마을이라고 칭하며, 옛 어른들의 삶의 터전에서 자리 잡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이 대단히 아름답다. 우스리스크 이곳은 바로 발해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실천장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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